1926년 3월 18일 리다자오가 주재한 베이징 인민들은 천안문에 모여 팔국 최후통첩 거부와 다구커우 방어시설 철거 등 불합리한 요구에 반대하며 항의했다. 당시 집권정부는 총격을 명령했고, 집회를 일으킨 사람들은 부상을 입거나 심지어 사망하기도 했다.
이유는 1926년 3월 12일 풍위향 국군이 풍씨 군벌들과 전투를 벌일 때, 일본 군함이 천진 다구커우로 항해하던 풍준 군함을 덮고 국군을 포격해 사살을 했기 때문이다. 10명 이상의 수비수에게 부상을 입혔습니다.
공격을 받은 국민군은 단호하게 반격해 일본함대를 다구커우에서 몰아냈다. 이후 일본은 실제로 영국, 미국 등 8개국과 힘을 합쳐 1926년 3월 16일 단치루이 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내 다구커우의 방어시설을 해체하라는 무리한 요구를 했다.
퍼레이드 도중 단치루이 집권 정부 관계자들은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을 것을 우려해 군경에 무력으로 퍼레이드를 해산하라고 명령했고, 이로 인해 47명이 사망하는 참사를 겪었다. 현장에서 2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행진 과정에서 사망한 유명 인사로는 베이징 여자 사범대 학생 류허전(Liu Hezhen)과 첸치오니안(Chen Qionian)도 부상을 입었다.
추가 정보:
사건의 영향:
당시 "타임즈"는 이 사건을 "수간"의 "충격적인 비극"이라고 불렀습니다. 루쉰은 이날을 "민국 이래 가장 암울한 날"이라고 불렀다.
'유시', '내셔널 뉴스', '월드 저널', '칭화 위클리', '모닝 포스트', '모던 리뷰' 등이 만행을 규탄하는 대열에 합류했다.
샤오피아오핑(Shao Piaoping)이 의장을 맡은 '베이징 뉴스(Beijing News)'는 당시 수많은 뉴스와 논평을 지속적으로 게재하면서 비극의 진실을 광범위하고 심도 있게 보도했습니다. Supplement'에도 관련 기사가 게재됐다.
바이두백과-3·18학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