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혼의 기쁨은 신체의 만족을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 > 이 논술에서 몸과 영혼의 대립 이원론은 기본적인 틀이다. 몸은 짧고 영혼은 불멸의 것이다. 몸은 탐욕이고 영혼은 순수하다. 몸은 저급하고 영혼은 고급이다. 몸은 틀렸다. 영혼은 진실이다. 몸은 악을 초래하고, 영혼은 선함에 도달한다. 몸은 보이는 것이고 영혼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대체로 영혼은 매우 복잡하지만 지식, 지혜, 정신, 이성, 진리와 함께 서서 몸에 대한 거대한 우월감을 누리고 있다. 몸은 바로 플라톤이 추앙하는 가치의 반대이다. 그것은 영원하고 절대적인 이념에서 낯설고 멀다.
> > 하지만 세속의 도시의 사랑은 순간적이고 짧은 기쁨에서 비롯되며, 시기적절한 만족을 위해 주재한다.
> > 형이상학은 몸을 성인의 본질로 보는 것을 결코 꺼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몸은 동물성 물건이고 사람과 동물 * * * 이 함께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의 야수성에서 벗어나려면 가장 큰 가능성으로 자신의 야수적 기초인 몸을 배척해야 한다. 사람이 순결할수록, 정신신자일수록 욕망의 몸에서 벗어나야 할수록 몸의 힘을 소멸 상태로 줄여야 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믿음명언) 사람이 이성이 될수록 목적과 계획적으로 실천해야 하고, 절대적인 정신과 과학 지식을 얻을수록 신체의 맹목적인 혼란의 우연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 > 의식의 출현은 처음부터 신체의 자제를 기초로 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의식과 몸, 지성, 감성, 만약 정말 겨루기가 있다면, 이 둘의 관계는 서로의 잔인한 경기 관계를 없애는 것이다. (조지 버나드 쇼, 자기관리명언) 이것이 의식과 신체의 기본 관계 모델이자 철학적으로 이런 이원 서사의 첫 싹이 돋아난 씨앗
> > 동물성은 신체적입니다. 즉, 압도적인 충동으로 가득 찬 몸입니다. 몸이라는 단어는 모든 충동, 추진력, 열정의 지배 구조에서 눈에 띄는 전체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충동, 추진력, 열정은 모두 생명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물성 생존은 단지 신체적일 뿐, 그것은 권력의지이기 때문입니다.
> > 두 가지 불균형한 힘은 관계를 형성하기만 하면 하나의 몸을 구성한다. "
> > 의식의 출현은 몸과 본능을 억제하고 내부를 향해 발전하여' 깊이, 폭, 높이' 를 갖게 한다. > >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 및 gt; > 독서는 더 이상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신" 교류가 아니라 몸과 몸 사이의 포르노 게임이다.
> > 독서는 신체행위, 쾌감의 생산행위로 변한다. 쾌감의 즐거움은 신체적인 반지식 실천이다. 지식의 폭정을 풀면 광희가 뒤따르게 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독서명언)
> > 포르노는 신체의 자연스러운 충동이지만, 이성적인 세속 세계가 있다. 이 세상은 신체의 자연충동을 동물세계로 향하는 야만적인 귀환으로 간주하고, 더러움과 더러운 비난을 해야 한다.
> > 인간의 신체적인 본능적 충동은 더 이상 동물처럼 직접적이고, 자연스럽고, 순수하고, 실오라기 없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인 행동은 인간화된 물건에 오염되고, 사람도 그 원시적인 동물성을 단호히 제거할 수 없다.
> > 흉악한 몸과 이성적인 자의식의 잔혹한 대결 과정에서 찢어진 포르노 경험 속에 묻혀 있다.
> > 니체가 몸과 몸의 힘을 세계의 척도로 여기는 것처럼, 델러즈도 몸을 거대한 욕망 기계로 본다.
> > 바타예는 포르노를 신체의 중요한 부분과 내용으로 보고, 델러즈는 신체의 구체적인 내용을 없애고, 그는 신체의 내부 세부 사항을 신경쓰지 않고, 몸을 생산적인 힘으로 추상하고, 내용이 없는 생산적인 욕망으로 추상화한다. 니체의 몸은 생산, 평가, 창조를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델러즈의 이 욕망기계도 끊임없이 생산되고 창조되고 있다.
> > 욕망은 억압을 받지도 않고, 만족을 얻지 못해 생기는 심리적 부족 상태도 아니다. 오히려 욕망은 적극적이고 한결같이 활기차고, 현실을 생산한다. "사회 생산은 정해진 조건 하에서 순수하고 욕망 생산 그 자체일 뿐이다."
> > 욕망은 영원히 흐르고 있다. 그것은 "유체를 앞으로 흐르게 하고, 그 자체도 흐르게 하며, 이러한 흐름을 중단시킨다."
> > 신체는 사회적 현실을 생산하고 역사를 생산하며, 신체의 생산은 사회 생산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건강명언) > > 오늘의 역사는 몸이 소비주의에 처해 있는 역사이며, 몸이 소비 계획과 소비 목적에 통합되는 역사이며, 권력이 몸을 소비 대상으로 만드는 역사이며, 몸이 찬양, 감상, 놀이를 받는 역사이다. 몸은 그것의 생산주의 새장에서 해방되었지만, 오늘날, 그것은 자제할 수 없이 소비주의의 함정
> > 몸, 이것은 개인의 마지막 사유재산이다. 아무것도 없는 거지는 여전히 자신의 몸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몸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다. 몸은 자아의 상징적인 특징이다.
> > 사실, 몸은 생명의 한계이며, 바로 몸의 기초 위에서 생명과 그 여러 가지 의미가 터져 나오는 것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건강명언) > > 벌거벗은 생명은 의미를 벗긴 몸, 인간성을 벗긴 몸, 생명의 형태와 가치를 벗긴 몸, 순수한 동물 같은 몸이다.
> > 권력관리생명의 두 가지 형태: 하나는 권력이 단일 신체에 대한 강화 훈련이고, 권력이 단일 신체에 대한 이런 관리는 신체의 해부정치학이라고 불린다. 또 다른 하나는 전체 인구수에 대한 관리 통제 형식이다. 이것이 바로 인구의 해부정치학이다.
> > 출생, 즉 순수한 자연생명 자체, 즉 우리가 말하는 순수한 몸-"여기서 처음으로 주권의 직접적인 전달체가 되었다."
> > 즉, 우리가 말하는 순수한 사람, 혹은 벌거벗은 생명, 순수한 몸/생명 자체가 자연스럽게 각종 권리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자기관리명언)
> > 민족 국가의 쇠락과 인권의 종말 "이라는 두 사람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관성이 있다.
> > 한 민족 국가의 영지에는 두 가지 성격의 신체/생명이 있다. 하나는 시민권이 있는 생명이고, 다른 하나는 시민권이 없는 생명이다. 하나는 본연의 생명이고, 하나는 정치적 가치가 없는 생명이다. 하나는 보호해야 할 생명이고, 하나는 보호할 가치가 없는 생명이다.
> > 생명은 국가 법질서에 의해 정치화되거나, 국가 법질서에 의해 제외되거나, 즉 권리가 있는 생명이거나, 벌거벗은 생명이다.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거나 마음대로 처형할 수 있는 희생자 (homosacer) 입니다.
> > 그들은 단지 벌거벗은 생명일 뿐이다.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과 강제 수용소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무의식적으로 희생자와 동등하며, 살인의 허가 없이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생명과 같다. "
> >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대학살과 인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은 인종적 위협을 없애고 인종을 보호하는 신체 건강을 결합하는 것이다.
> > "국가 사회주의의 모든 정치적 조치는 국민의 생명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 오늘날, 우리는 국민의 신체의 인종적 특징과 유전적 건강이 유지되는 한, 국민의 생명이 보장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 다른 인종을 죽이는 것은 자신의 인종을 더욱 순결하고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포레스트 검프 (Forrest Gumben) 는이 대량 학살의 전제가 유대인의 삶을 벌거 벗은 삶으로 만들고 유대인을 희생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했다.
> > "생물학적 사실 자체는 직접 정치성이고, 정치적 사실 자체는 바로 생물학적 사실이다."
> > 포르코는 종족학살의 사실을 알아차렸는데, 나치가 자신의 인종을 더 순결하게 하기 위해, 인종을 더욱 안전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 인종을 다른 인종의 위협으로부터 제거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살인은 실제로 더 나은 생존을 위한 것이다. 자신의 인종과 인종의 몸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 > 나치주의 학살의 기술적 전제는 18 세기에 마련된 권리, 시민권, 신체의 연결 단서를 끊어 몸-생명을 권리와 역사적 맥락을 벗어난 적나라한 생명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도살자는 주권을 잃고, 시민권을 잃고, 희생자가 된다. 이 적나라한 생명은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이다. 사람들은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그를 죽일 수 있다. 그래야만 학살이 자유로워지고 거리낌 없이 인종 건강을 도모하는 목적을 순조롭게 달성할 수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전쟁명언)
> > 제이크는 이렇게 풍자했다. "폭탄인지 음식 소포인지 절대 모를 거야."
> > "사람들은 범죄의 심각성을 이유로 사형을 보류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자의 잔인함과 누차 가르침을 고치지 않고 사회안전을 수호하는 것을 이유로 더 많이 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지혜명언) 사람들은 합법적인 수단으로 다른 모든 사람에게 생존 위협을 구성하는 사람들을 처형한다. "
> > 우리는 사형을 둘러싼 논쟁을 보고, 여태껏 끊이지 않았다. 사형수들은 반드시 공민의 권리를 박탈당해야 하고, 반드시 적나라한 생명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범죄자가 법적으로 권리를 상실한 후에야 그를 죽일 수 있다. (존 F. 케네디, 명예명언) 그러나 모든 권리, 적나라한 생명 자체, 동물 같은 몸을 잃어도 죽임을 당해야 하는가? 생명 자체는 그 자신의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 > 몸은 두 가지 정반대의 정치적 시야를 얻었다. 그것은 "양면성의 존재물로, 최고 권력에 대한 굴복과 개인의 자유를 싣고 있다" > > 우리가 가정여성의 품에 안긴 애완동물에게 이미 본 바와 같이, 동물들은 인간의 권리뿐만 아니라 사람의 감정도 약탈하고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동물명언)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동물명언)
> > 현대국가에서 가장 큰 임무는 몸을 보호하고, 몸을 보완하고, 몸을 강화하는 것이다.
> > 몸은 민족 국가의 정치 경제 대상이자 민족 국가 자체의 은유이기도 하다. 그것이 정치 경제의 대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다양한 지식을 받았기 때문이다.
> > 몸은 이렇게 국가 권력의 초점이 되어 국가의 눈길이 뚫어지는 대상이 되었다.
> > 니체의 말에 따르면, 그것들은 모두 힘 자체이며, 그들은 힘 자체를 이용하여 통일을 얻었다.
> > 개인의 몸이 강화되어야만 국가 몸이 강화될 수 있다. 이 둘은 서로 쫓고, 서로 장난치고, 서로 끌어당기고, 서로 모인다.
> > 개인의 건강만이 전체로서의 국가 신체가 적국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건강명언)
> > 이 단일 개인 몸은 한 나라의 몸을 동시에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한 나라의 몸 안에서 동시에 반사되어 짜서 하나의 몸 * * * * 동체를 만들 수 있지 않습니까? * * * * * * * * * * * * * * * * * * *. 이런 개인과 국가가 하나가 된 몸은 강화 과정에서만 정치 * * * 동체의 틀 아래에서만 대외적인 몸을 정복할 수 있다.
> > 국가 몸의 본능은 상징적인 힘의 정복과 사실성의 힘의 정복을 모두 해야 한다. 스포츠 경기는 국가 간의 상징적인 대항이고, 군사 충돌은 국가 간의 사실적인 대항이다.
> > 이런 의미에서 몸과 밀폐된 공간은 항상 긴장 상태에 있으며, 몸은 항상 자신을 감금하는 공간을 돌파해야 한다. 서로 대치하는 두 가지 몸의 힘만이 일시적인 균형에 도달한다. 두 가지 신체가 계산된 후 서로 주저하며, 각자의 공간이 일시적으로 신체의 힘의 충돌을 견딜 수 있을 때만 몸의 공간 경계가 상대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
> > 전쟁은 결코 도살 자체의 쾌감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전쟁은 신체의 생존을 해결하는 방식이며, 신체의 본능을 만족시키는 방식이며, 공간에 대한 재생산 욕구를 확대하는 방식이다.
> > 이성과 충동이 어느 시점에서 적절하게 결합되어야만 우리는 국가 신체가 제한된 공간전쟁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 > 전자의 해결책은 정해진 공간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공간의 인구를 줄이는 것이다. 후자는 반대로, 정해진 인구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공간을 확대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내전과 외전, 이 두 가지 대규모 살육 형식은 인구와 공간 긴장 관계를 조절하는 기술로 등장했다.
> > 성은 합법적인 부부 침대 위에 고착하거나 알려지지 않은 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다.
> > 어떤 의미에서 성은 더 이상 특별하고 사유적인 생활 실천 형식이 아니다. 성은 공개적이고 금기할 수 없는 평범한 삶이 된다. 그것은 추하지도 시적도 없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남녀명언) 더럽지도 거룩하지도 않다.
> > 오늘날 성은 공공 * * * 정치 분야나 공공 * * * 도덕 분야에 속하지 않으며, 성은 자기 기술 분야에만 속한다. 성은 스스로 행동할 수 있고, 스스로 통제할 수 있고, 성은 더 이상 정해진 윤리의 법칙을 쫓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법칙을 창조하고 발명할 수 있다.
> > 농담과 쌍둥이처럼 친밀하다. 그들은 서로 힘을 빌려 일상생활의 모든 공간을 헤치고 다닌다. 때때로 성말의 기쁨은 성 자체의 기쁨보다 낫다. (서양속담, 행복속담) 성어는 소용돌이처럼 강한 흡착력과 동시에 강력한 관통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무거운 관문을 돌파하여 곳곳에 가득 찼다.
> > 몸의 광채는 성의 광채이다. 건강은 섹시함에 가려져 몸의 침묵지대로 물러났다. 몸의 거대한 포효는, 다만 성이 공개적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다.
> > 몸과 마음의 오랜 대립 속에서 외적인 신체 이미지도 결정적인 지배력을 얻었다. 마음은 점점 허구의 발명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것은 텅텅 비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지혜명언)
> > 니체 심리학에 따르면, 몸의 내적 힘이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에 내면으로 자신을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열정은 다른 사람에게 적용될 수 없거나, 외부 몸의 목표를 찾을 수 없고, 자신의 몸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존 F. 케네디, 열정명언) 이것은 패자의 자기 기술
> > 외적 세계 전체가 빛을 잃었고, 생명은 단순한 칠흑 속에 빠진 것이 아니라 칠흑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속에 빠졌다